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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수(kakasoo) 2022. 6. 26.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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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친구와 만나 이야기를 했다. 친구는 새로운 커리어를 고민 중이었다. 지금까지 하던 일과 아예 다른 일을 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고 한다. 이 친구는 개발자도 아닐 뿐더러, IT 직군에서 일하는 사람도 아니고, 오히려 공기업에서 일하는 친구였지만, 맥락은 충분히 이해될만한 말이었다. 이 말은 나도 크게 공감하는 일이다. 나도 언젠가 개발 외의 다른 일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도 그런 게, 개발 쪽은 기술 발전의 속도가 매우 빠르다고 한다. 개발자 잡지인 readIT에서 NHN 클라우드 부문 CTO인 김명신님의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이 분야는 18개월 마다 지식의 반이 무용지물한 것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이를 지식의 반감기라고 부른다는데, 언젠가 이 속도에 뒤처지는 일이 생길 것이다. 지금이야 내 머리가 아직 굳지 않은 덕분인지, 18개월마다 나한테 사라질 절반의 지식을 새로 습득하는 게 그리 어려워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꼬마 아이의 인생 절반이 채 몇 년인 반면, 어른의 인생은 수십 년일 수 있듯이, 아직 내가 배운 게 적어 그 절반을 새로 채우는 데 어렵지 않다 느끼는 걸 수도 있겠다. 주니어 개발자인 내 지식의 절반이, 경력 많은 선배님들의 절반과 같을 리 없으니깐. 그래서 언젠가 내가 내 절반을 따라잡는 데 급급한 시기가 온다면 내가 원하더라도 개발자로 남는 게 불가능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나한테 욕심이 하나 있다면, 그 시기를 최대한 뒤로 미루길 원한다. 언젠가 따라잡히더라도, 최대한 나중에 따라잡히고 싶단 생각을 한다.

 

예전에 내가 처음 개발을 공부할 때, 나는 아침에 카페에 가면 밤까지 죽치고 앉아 있곤 했다. 눈치가 보이면 케이크 하나, 커피 하나, 그렇게 카페에 10,000원, 20,000원 쓰는 돈을 늘려가면서 하루를 버티곤 했다. 나는 공부를 할 때면 매번 타이머를 켜놓고서 공부를 했는데, 그렇게 1년 이상을 버티다 보니 3,000시간은 코딩만 하고 살았던 것 같다. 그 때 내 공부 방법은 항상 오늘 시간에 따라 잡히지 않는 거였다. 아니, 최대한 뒤에 따라 잡히는 것이었다. 가령 아침 8시에 공부를 시작했다면 오후 12시가 될 때, 타이머의 시간은 4시간이어야 했다. 그러면 나는 속으로 '나는 오늘 하루보다 4시간 빨리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될 리 없었고, 오후 5시만 되더라도, 하루의 시간은 내 타이머 속 시간보다 더 빨라졌다. 그러면 다시 나는 속으로 '아니, 왜 아침부터 공부를 했는데 벌써 따라잡혔지?' 라는 생각을 했고, 최대한 집중력을 올리려고 노력했다. 남들은 이러면 번 아웃 ( burn-out )이 온다고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공부 시간을 늘리는 데만 집중했다. 그래도 오늘 시간에 따라 잡히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은 따라 잡힌다는 것만 배웠다.

 

내가 타이머를 켜놓고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지만, 인생에도 타이머가 있는 것 같다. 이 타이머는 항상 내 결단의 시간을 나타내고 있을 것이다. 내가 무언가 결단을 할 때마다 타이머는 동작할 것이고, 언젠가 이 시간이 어느 한계점에 도달할 때가 오면 내 결단은 의지와는 무관하게 끝나고 말 거라는 생각을 한다.공부 시간과 마찬가지로, 내 개발자로서의 삶도 언젠가 '반감기'를 따라잡지 못하는 순간이 올 텐데, 비슷한 맥락에서 그 때 '뒤처짐'을 경험하진 않을까 싶다. 나는 이 '뒤처짐'이 싫다. 물론 그 때가 되면 새로운 타이머를 켜고, 다른 목표를 잡으면 된다. 하지만 언젠가 따라잡힌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목표를 세우면 그만이라고 해도, 그 언젠가를 최대한 뒤로 미루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다. 본래 개발을 한 것은, 언젠가 내가 창업을 꿈꾸게 될 때, 창업 비용을 낮추고자 함이었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비즈니스와 기술 사이에서, 기술 쪽의 가치를 존중하게 된 모양이다. 이제는 사업보다도, 개발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느 순간 주객전도가 된 모양이다.

 

나는 기술자로서 내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고, 그리고 기술자로서 어떻게 해야 그 가치를 올릴 수 있는지를 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 가치가 상대적이며, 언젠가는 의미없는 것으로 전락할 거란 것도 잘 이해하고 있다. 기술자는 언뜻 보면 예술가와 닮은 부분이 있다. 사고 방식과 행동도, 그리고 시대를 탄다는 것도 일견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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